"물류센터에 무지개가 떴습니다."
지난 8월 중순 운산그룹 전 사원에게 도착한 메일 제목이다. 발신자는 운산그룹 와인 계열사인 나라식품 물류센터의 양승광 본부장. 양 본부장은 문 연 지 얼마 안된 나라식품의 물류센터에 방문했다가 무지개를 봤다. 6611㎡(2000평)가 넘는 대지에 건평만 2644여㎡(약 800평), 최대 110만병의 와인 보관이 가능한 나라식품의 물류센터에 무지개가 걸쳐 장관을 이루자, 그는 지체 없이
디지털카메라에 풍경을 담았다.
양 본부장은 사진과 함께 전 직원에게 보내는 이메일에다 "앞으로 회사가 발전해나간다는 징조 같아서 사진을 찍었다. 전 직원이 이 사진을 보면서 희망을 갖고 업무에 임한다면 더욱 발전하는 회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사진을 받아본 사원들은 그날 내내 기분이 한결 유쾌해졌다고 전한다.
요즘 운산그룹 직원들이 항상 디지털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생긴 일이다.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이 강조하고 있는 소위 '디카경영'의 단면이다. 운산그룹은 동아원(밀가루 수입·사료), 한국제분, 나라식품(와인), FMK(수입차 판매) 등을 보유한 매출 6500억원대의 종합식품유통그룹.
워낙 다양한 분야의 계열사를 보유하다 보니 이 회장은 미국, 중국, 프랑스, 동남아시아 등 국외 출장 기회가 잦다. 그때마다 이 회장은 직원들을 대신해 해당 국가에서 본 가게나 이색적인 물건 사진, 새로운 업태를 소개하는 팸플릿 등을 직원들에게 전달해왔다. 새로운 트렌드를 익히고, 자극받아 국내 사업에 곧바로 적용하란 의중이었다. 물론 이 회장이 보내준 새로운 메뉴판, 와인 소개자료 등은 관련 계열사에 전달돼 곧바로 업무 개선에 활용되는 등 적잖은 효과를 발휘해왔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계열사 직원들에게만 정보가 전달되다 보니 '이런 게 있구나'란 정도의 반응 이상으로 전 계열사에 확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본인이 늘 갖고 다니던 디지털카메라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전 직원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자면 '긴 글'보다는 '사진'이 효과적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디카경영'은 이렇게 시작됐다. 물론 그전에도 사진을 올릴 수 있도록 인트라넷 '운산넷'을 운영하고 이메일 보고 체계를 갖추는 등 외형적으로는 지식경영 시스템을 완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운산넷'의 지식관리, 그룹게시판 코너는 경쟁사 동향 보고, 내년 경제전망 등 딱딱한 정보들만 오가다 보니 관련 직원들만의 정보공유 창고에 그쳐 있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디카경영'은 직원들 사이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100마디 말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이해하기가 쉽고, 따라서 이에 대한 반응도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나라식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신성호 마케팅 본부장은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에 잡히는 재고와 실제 재고를 파악하기 위해 와인 셀러를 자주 방문하는데 재고 조사 중 와인라벨에 난 흠집을 발견해 디카에 담았다. 이 사진을 전 사원과 공유하자 재발 방지를 위해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됐다. 이에 따라 와인라벨이 손상되지 않도록 취급하는 방식을 조정하게 됐다.
와인 패키지 변화도 '디카경영'의 산물. 외부 미팅을 끝내고 백화점, 할인점을 돌며 시장조사를 하던 나라식품의 영업사원은 백화점 1층에서 화장품 패키지를 발견했다. 와인 관련 패키지는 아니었지만, 실용적이고 심플한 디자인에 반해 사진을 찍어뒀다. 예쁜 디자인의 포장재도 발견하는 대로 디카에 모두 담았다. 그로부터 2개월 뒤, 나라식품에서는 새로운 와인 패키지를 선보일 수 있었다.
'전 사원의 홍보맨화'도 가능해졌다. 윤영규 나라식품 사장은 "최근 국내 와인 메이커스 디너에 우연히 참석한 기자가 사진을 요청했을 때가 있었다. 당시 홍보직원들이 다른 곳에 있어 곤란했는데 마침 영업사원이 찍어둔 게 있어 바로 제공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애견 사료 등을 유통하는 대산물산도 '디카경영'의 수혜를 입고 있다. 김기환 대산물산 대표는 "그전에는 타사 동향을 말 혹은 글로 보고받는 것에 그쳤는데 최근에는 영업직원들이 수시로 사진을 찍어 보내주다 보니 '현장경영'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요즘 애견들의 건강을 챙기는 소비자들이 늘다 보니 관절, 탈모에 좋은 사료 등 특화한 제품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는 것을 디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받았다. 제품 개발, 상품 판매 등의 전략을 짤 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사내 정보공유가 점차 활발해지다 보니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도 일어나는 모양새다. 본인이 소속된 회사일만 관심 갖는 게 아니라 다른 계열사들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는 일도 늘고 있는 것. 이를테면 윤영규 나라식품 사장이 국외 출장 중에 현지 요리 사진을 찍어 올리고 최근에 새로나온 와인 라벨 모양도 보내줬더니 그룹 산하 요리아카데미 '츠지원'에서 강의자료로 사용하거나 행사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식이다. 이희상 회장이 국외에서 기사작위를 받은 후 프랑스 와이너리 만찬에 초대됐을 때의 사진은 페라리,
마세라티를 파는 FMK에 큰 도움이 됐다. 국내 VIP를 대상으로 하는 행사 때 '귀족파티'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직원 사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박혜연 츠지원 팀장은 "최근 일본 방송사가 츠지원을 촬영하러 왔을 때 당시 상황을 사진으로 전 사원들에게 전달했다. 그걸 본 다른 계열사 직원이 '우리 회사가 국제적으로도 도약하는구나'란 자부심을 느꼈다고 전해와 뿌듯했다"고 전했다.
나라식품에서는 여세를 몰아 연말에 디카경영에 일조하는 직원들에게 미국의 희귀 와인 한 병을 즉석 시상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와인의 가치가 워낙 높다 보니 직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이 윤 사장의 전언이다.
한정화 한양대 교수는 "중견기업의 경우 CEO의 의지와 더불어 직원들의 사내 정보공유가 상당히 중요하다. 전자저울업체인 카스는 국내외 사업장 간 실시간 정보교류로 경쟁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대외 교류도 중요하지만 사내 정보공유가 새로운 사업 진출이나 경쟁력 제고 방안 등에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운산그룹은 현재 약 6500억원대의 매출을 2015년까지 1조원 이상으로 올린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이희상 회장은 "주력인 제분과 사료사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고 와인사업의 선두적인 위치를 공고히 할 것이다. 동시에 국외자원개발과
바이오산업 진출 등을 통해 종합식품그룹에서 향후 글로벌 복합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고자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회장의 비전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지금도 직원들 손에 들려 있는 디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30호(09.11.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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