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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같은 나, 숨도 작게 쉬어야 할까

시사IN | 김현진 | 입력 2009.11.07 08:36

 




회사를 그만둔 것이 겨우 1년여 전 일인데도, 어딘가 소속되어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갔다가 하는 일을 내가 정말 했었는지 아득하다. 몇 개월 전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주책없이 짧은 바지 입고 오토바이 몰다가 엔진에 데면서 일을 접었다. 말 그대로 '무노동 무임금'의 생활이지만, 여기에 무소비를 곁들이면 나름대로 살 만했다. 술 안 마시고, 사람 안 만나고, 휴대전화 안 쓰면 돈 쓸 데가 없었다. 비결은 그냥 숨만 쉬는 거다. 돈을 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매체는 텔레비전이건 인터넷이건 죄다 멀리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나름 효력이 있었던 이 정책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던 건 가족의 경제적 고난이 가중된 다음부터였다. 누군가는 벌어야 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력서와 포트폴리오와 자기소개서를 고쳐 쓰고 또 고쳐 쓰고, 구인 사이트를 뒤지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력서를 냈는지도 가물가물한 회사에서 몇 주 후에 기어코 이 메일로 불합격을 알려줄 때는 그 친절함까지 야속했다. 경력 5년 차이지만 근사한 경력도 아니고 '나이가 서른에 가까운 직원이 소용이 있을까, 연봉 1300만원에도 일할 애들이 널렸는데' 하는 생각이 10분 간격으로 들 때쯤 결국 이력서 고쳐 쓰기를 중지했다.

구인 사이트 대신 찾은 곳이 부동산이었다. 다달이 돈을 받아 부모님에게 보내겠다는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요원하니, 결국 손에 쥐고 있는 걸 터는 수밖에 없었다. 옥수동 자취방이 철거되면서 작년 이맘때 밀려나서 또 철거 지역인 종암동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제 그 방에서도 나왔으니 어디엔가 전입신고를 해야 하지만 전입할 곳이 없어 철거민도 못 되는 노릇이다. 무노동·무임금·무소비와 바꾼 대가이니 불평할 수야 없다. 다만 그 사람들을 떠올린다. 학동역에서, 신도림역에서, 교대역에서, 사당역에서 아침 일곱 시 혹은 저녁 여덟 시경에 마주치던 그 수많은 사람, 그렇게 고단해 보이는 광경은 다시 없다. 졸린 눈을 애써 뜨고 영어 교재 같은 걸 읽거나, 입을 벌리고 자거나, 늦잠 잔 대가로 콤팩트 뚜껑을 열고 주위 눈치를 보며 얼굴을 토닥거리던 그 사람들.

어느 회사건 처음 들어왔을 때는 능력이 고만고만한 법이다. 늦잠 좀 자도 회사에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는 사람과 안산에서, 용인에서, 인천에서 와야 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나는 건 능력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의 차이다. 복잡한 시간의 사당역을, 신도림역의 사람 홍수를, 혹은 여자라면 가끔은 더듬는 손을 매일 헤쳐나가야 하는 피로를 견디다 못해 방이라도 얻을라치면 한 달에 150만원 벌어서 40만~50만원을 깔고 앉아야 하는 현실.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는 건 누적된 피로의 차이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해서 500만원 주는 회사에 가서 50만원 넣으면 될 것 아닌가, 사원 기숙사를 제공하는 회사로 가면 될 것 아닌가 하고, 적어도 나만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건 그 피로를 인정해버리는 순간 훨씬 더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점심시간이 끝난 후 테이크아웃 커피 종이컵을 손에 든 채 잡담을 나누며 사무실로 복귀하는 모습이 대학생들의 '로망'이라지만, 내게 그 사원증은 출퇴근 기록을 체크한 뒤 '넌 야근 한 번 안 하냐'며 까일 때 쓰이던 기억만 뚜렷하다. 다만 무노동· 무임금·무소비·무주소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침저녁에 마주치던 그 사람들이 앉아서 갈 수 있도록 그들이 지쳐 있는 시간에는 신도림역 같은 곳에 가지 않는 것, 그리고 학생들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드나드는 것뿐이다. 사실 무노동·무임금·무소비·무주소자라니, 이건 있는 듯 없는 듯한 걸 넘어 유령인지도 모른다. 미안해서 숨도 조금씩 쉬어야겠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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